-273.15℃




종이에 담채, 58.0×818.0 cm, 간송미술관 소장

(http://kansong.org/collection/chokjandokwon/)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불행한 일생을 산 화가이다. 명문가 출신이었던 현재는 조부인 심익창(沈益昌, 1652-1725) 대에 이르러 집안이 급격히 기울어갔다. 심익창이 과거시험에서 아들을 합격시키기 위해 부정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어 유배형에 처해지고, 유배에서 풀려나자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를 시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벼슬길은 당연히 막히고, 그저 숨죽여 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심사정은 생계를 위해 그림에 매진하게 된다. 「촉잔도권」은 심사정이 말년에 그린 거작이다.


 촉잔도권이란 '촉으로 가는 험한 길'이라는 의미이다. 촉도는 중국의 관중(關中)에서 사천(泗川)으로 가는 길로서, 고단하고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촉잔도권」에서 드러난 낭떠러지들과 세찬 물길, 그리고 그런 길을 힘겹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불행한 심사정의 인생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은 험난함만을 담지는 않았다.


 "긴 화면에는 아찔한 산과 바위, 거센 강물이 반복적으로 펼쳐져 있지만 고통과 인내를 강요하는 위협적인 느낌은 아니다. 산세는 험하지만 물길이 숨통을 틔어 주고, 골골이 자리한 소박한 산촌은 따뜻한 온기를 전해준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고통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나 고난을 극복하려는 결의에 찬 모습이 아니다. 그저 쉬엄쉬엄, 그러나 겸손하고 정성스럽게 한 걸음씩 짚어 나가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처럼 보인다.


 격정적인 감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아우르는 유장함이 그림 전체를 지배한다. 거칠고 모진 붓질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그림의 분위기는 오히려 차분하며 고즈넉하다. 특히 두루마리 마지막 부분의 평온함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은 후, 욕심을 덜어내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초탈한 노인의 뒷모습과 닮았다. 이 그림이 주는 진정한 감동과 의미는 작가가 일생토록 감내한 고통이나 분노가 아니라, 지나온 모든 것을 더듬는 담담한 관조와 따뜻한 아량이다."



참고문헌 및 발췌: 백인산, 『간송미술 36회화』, 컬처그라퍼, 2015, p.154-173.